감정적 무관심은 자신을 심각하게 모욕한 사람을 떠올렸을 때도 강력한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경지
그 사람도, 그 사람이 준 상처도 모두 과거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. 물론 그 당시에는 무척 고통스러웠지만 이제 다 지나간 일입니다. 이미 지난 일을 두고 계속 불행해할 필요는 없습니다.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그것을 뒤로하고 나아갈 수는 있습니다. 비니가 아무 감정의 동요도 없이 찰스를 떠올릴 수 있을 때 무관심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. 자신이 증오하는 사람을 떠올렸을 때 심장이 쿵쾅거리지 않거나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거나 속이 뒤틀리지 않는다면 감정적 무관심을 이룬 것입니다.
어차피 원래 그런 사람들이었고, 그런 자신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도 그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무관심해질 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. 용서와 화해는 전환이나 감정적 무관심에 비해 이루기 어렵습니다. 하지만, 장기적으로 보면 더 큰 혜택이 있습니다. 용서와 화해는 깨진 관계 속에서 받은 상처를 치료하도록 도와줍니다.
또한, 인생이 정말 나아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매우 큰 선물을 주는 셈입니다. 내가 생각하는 용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는 정신분석학자 '로버트 캐런'의 "용서는 누군가를 다시 마음속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"입니다. 즉 캐런 박사의 말은 용서란 자신을 해친 사람에게 연민과 관용을 베푸는 행위라는 것입니다. 상대방을 용서할 의무는 없습니다. 상대방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주장은 부담을 줄 뿐이지만, 용서는 치유의 과정인 동시에 변신의 과정입니다.
이를 통해 완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나기 때문입니다. 그러나, 용서라는 말에는 함정이 하나 있습니다. 자신은 늘 착한 사람이고 가해자는 늘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. 글로 쓰면 쉽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려면 상대방이 한 나쁜 일 말고도 좋은 일까지 의도적으로 기억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어렵습니다.
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상처준 사람에 대한 긍정적인 이야기를 했을 때 격분해서 상대방의 말을 끊고 그 사람의 결함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용서의 첫걸음은 떼었다는 의미입니다. 만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도 참여할 수 있다면 훨씬 큰 진척을 보인 것입니다.
증오를 버릴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은 화해입니다. 화해는 가해자와 다시 관계를 맺는 일입니다. 즉 실제로 편지를 나누거나 대화를 하거나 얼굴을 마주하는 것입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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